2026. 7. 9. 20:03ㆍ틈새칼럼

어느 토론방에서
며칠 전 한 온라인 토론방에 들어갔다. 마침 최근의 한 논란이 화제였다. 어느 아이돌이 방송에서 쓴 사투리 한마디가 특정 커뮤니티의 은어인지를 두고 벌어진 그 논란이다. 나는 그 사건을 두고 글을 하나 쓴 참이라, 거기서 정리한 관점을 몇 마디 보탰다. 낙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 사람이 내 말을 요약했다. 그 요약은 내가 하지 않은 말이었다. 나는 정정했고, 그는 다시 요약했다. 여전히 내 말이 아니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내가 실제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점점 덜 중요해졌다. 그가 반박하고 있던 것은 내 문장이 아니라, 내가 속한다고 그가 판단한 어떤 유형이었다. 몇 시간 뒤 그는 대화를 접으며 적었다. 장황한 변명이 자기 시간을 뺏었다고.
그때 나는 화면을 보며 속으로 욕을 했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고. 그리고 곧바로 그를 어떤 무리에 집어넣었다. 저 사람들과 똑같다고. 정정하는 문장은 침착했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른 말이 끝나 있었다.
관심이 아니라 확신이 문제다
흔히 정치 과몰입을 관심의 과잉으로 여긴다. 뉴스를 너무 많이 보고, 정치 유튜브를 너무 많이 듣고, 그래서 균형을 잃었다는 식이다. 그런데 데이터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 경향신문과 중앙일보가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과 공동으로 기획하고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 3천 명을 조사한 결과, 정연경 국가미래전략원 선임연구원은 높은 정치 관심과 효능감을 가진 강성 지지층이 오히려 민주주의적 협치를 저해하는 양극화의 주된 동력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당 지지가 강할수록 자신이 정치를 잘 이해하고 참여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커지고, 그 믿음이 상대 진영의 입장을 틀린 것으로 단정짓는 경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관심이 많아서 문제가 아니라 관심이 확신으로 굳었을 때 문제가 된다. 확신에 이른 사람에게 상대의 말은 더 이상 들어야 할 내용이 아니다. 이미 아는 정답에 비추어 분류하면 될 대상이다.
같은 조사에서 한국의 정치 분열은 이념의 양극화가 아니라 정서적 양극화로 진단됐다. 정책을 두고 갈라지는 게 아니라 감정으로 갈라진다는 뜻이다. 정치 갈등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물음에 응답자들이 꼽은 1위는 강성 정당 지지자(21%)였다. 여당, 대통령, 야당, 기성 언론이 그 뒤를 이었다. 어느 쪽 강성인지는 묻지 않았다. 실제로 남북문제와 노동자·기업 문제를 제외하면 한미동맹 강화, 고소득자 과세, 사형제 폐지, 여성 차별 해소를 위한 정부 노력 같은 정책에서 양당 지지자들의 태도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토론방을 나오고 한동안 나는 그 사람을 생각했다. 왜 저렇게까지 하는가. 그러나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 사람 속은 밖에서 알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을 두고 세운 가설은 검증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악의로 그런 게 아니었다. 그가 지키려 한 것은 어떤 역사적 비극의 피해자들이었고, 그 마음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저 사람은 왜 저런가가 아니라, 무엇이 저 상태를 만드는가.
공산주의 반대와 성경은 무슨 상관인가
한 장면을 보자. 서울 도심의 대형 집회. 단상에는 담임목사가 있고, 그는 정치적 구호를 외친다. 청중은 화답한다. 이 장면에서 이상한 것은 구호의 내용이 아니라 구호와 그 자리의 관계다. 성경 어디에도 특정 정당을 지지하라는 구절은 없고, 공산주의 반대와 기독교 교리 사이에는 논리적 필연성이 없다. 그런데 왜 그 둘이 한자리에 있었나.
붙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형식이 같았으므로.
여기서 맹신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종교가 아니었다. 종교를 해석해주는 한 사람이었다. 신도들이 검증 없이 받아들인 것은 성경이 아니라, 성경과 정치를 이어붙인 그의 매개였다. 맹신의 구조는 이렇게 생겼다. 절대적 해석자가 있고, 그가 내놓은 교리는 검증을 면제받으며, 교리에 어긋나는 자는 이단으로 분류된다.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종교를 가진다는 사실 자체가 이 구조를 만드는 게 아니다. 어떤 종교 공동체는 정치적으로 조용하고, 신자들은 각자의 이유로 믿는다. 구조를 만드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과 정치 사이에 자기를 끼워넣고 해석을 독점하는 자리다. 그 자리가 비어 있으면 신앙은 정치가 되지 않는다.
신을 빼도 구조는 남는다
이 구조에서 종교를 하나씩 걷어내 보자. 신을 뺀다. 교회를 뺀다. 성경을 뺀다. 무엇이 남는가. 절대적 해석자, 검증 면제된 교리, 이단 판별. 세 개가 그대로 남는다.
이 셋은 종교 없이도 작동한다. 국회미래연구원은 팬덤 정치를 특정 정치가에 대한 맹목적 지지와, 그를 반대하는 같은 당 의원들에 대한 일방적 혐오가 한 짝을 이루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이때 당내 다원주의는 억압되고 비합리적 공격과 욕설이 정치의 언어가 된다. 밖의 적을 치는 것보다 안의 이단을 색출하는 일이 더 급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이단은 오래 이단으로 남지 않는다.
정서적 양극화의 뿌리로 학계가 지목하는 것도 정당일체감, 즉 특정 정당에 대한 항구적인 심리적·정서적 애착이자 정체성이다. 애착이 강할수록 자기 진영에는 소속감이, 상대에게는 반감이 커진다.
애착. 소속. 정체성. 항구성. 신앙 공동체를 설명할 때 쓰이던 말들이다.
신이 있어야 신앙이 생기는 게 아니었다. 신의 자리가 비어 있으면 무엇이든 그리로 들어간다.
빈자리를 채워주겠다는 사람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 자리에 들어가는가. 한 조사가 실마리를 준다. 시사IN과 한국리서치가 대선 이후 실시한 유권자 인식 조사에서, 20대 남성의 57%가 '더불어민주당과 진보진영에서 남성은 대체로 환영받지 못한다'는 진술에 동의했다. 정책 선호와 이념은 자신이 신뢰하는 정당과 정치인에 따라 형성된다는 정치학의 연구를 함께 놓으면 결론은 단순해진다. 자신을 대변해준다고 믿는 쪽의 이념을 따라가게 된다.
먼저 온 것은 이념이 아니라 결핍이다. 환영받지 못한다는 감각이 있고, 그 자리를 채워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 신앙이 시작되는 순서와 같다. 교리를 검토한 끝에 신자가 되는 사람은 드물고, 대개는 받아들여진 다음에 교리를 배운다.
그 빈자리를 노리는 쪽도 있다. 연세대 최영준 교수는 희생양을 끊임없이 찾는 극우 정치인들이 나타났고, 유럽에서는 그 대상이 이주민이었다면 한국에서는 성별이나 세대 같은 방식으로 희생양을 가져오는 세력이 힘을 얻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속을 제공하는 가장 값싼 방법은 공동의 적을 지정하는 것이다. 누구를 미워할지 알려주면, 그 미움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가 생긴다.
이 신앙에는 그것으로 먹고사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인은 지지층의 결집으로 표를 얻고, 결집은 적을 선명하게 그릴수록 단단해진다. 미디어는 갈등으로 클릭을 얻고, 논란이 길어질수록 기사는 더 나온다. 알고리즘은 분노를 오래 붙잡아두는 영상에 더 많은 노출을 준다. 누군가 확신하도록 설계된 시장이 있고, 그 시장은 개인의 신앙심을 원료로 쓴다.
모든 문을 여는 열쇠
내 또래를 보며 나는 다른 설명을 떠올린 적이 있다. 환경이 사람을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계속 미끄러지는 자리에 오래 서 있으면 버틸 힘이 남지 않는다. 그건 그 사람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오래 서 있으면 누구든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딘가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게임이든, 닫힌 방이든, 하루 종일 틀어놓는 정치 방송이든.
이 설명은 붙이는 대로 들어맞았다. 하루를 게임에 다 쓰는 친구를 보면 게임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눌린 사람이 찾아낸 숨구멍이라고. 밖에서 보면 그저 게임하는 사람인데, 나는 그 안의 상실감을 읽었다고 믿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다.
반례도 있었다. 같은 무게를 지고도 미끄러지지 않은 사람들. 나는 그들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 몰라 잠시 멈췄다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르는 순간 그들은 예외가 되고, 예외는 이야기를 흔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의 환경이 정말 같았는지, 옆에 누가 있었는지, 아니면 내가 보지 못한 방식으로 그들도 이미 어딘가 무너져 있었는지.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은 채 이름 하나를 붙이고 넘어가려 했다.
자료도 찾아봤지만 그 인과를 확인해주는 연구는 없었다. 청년 은둔이 늘었다는 것도, 그것이 정치 과몰입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둘을 잇는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같은 시대에 여러 가지가 함께 있다는 것과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이라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들어맞으면 증거고 어긋나면 예외라면, 이 이야기는 무엇으로도 틀릴 수 없다. 틀릴 수 없는 이야기를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다만 한 가지는 남는다. 인서울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부모 아래서 몇 년을 보낸 사람이 어느 날 방문을 닫았다면,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나였어도 그랬을 것이다. 이건 내가 검증한 명제가 아니라 검증할 생각이 없는 마음이고, 그 차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르다.
세 번의 대화
며칠 뒤 다른 자리에서 또 논쟁이 붙었다. 이번에는 교사의 정치적 중립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개인 자격으로 집회에 나가는 것은 자유지만, 수업 시간에 자기 정치관을 학생에게 설파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래서 나는 그 조직에 좋은 감정이 없다.
돌아온 말들은 이랬다. 그러니까 그 조직을 없애자는 말이냐. 어느 전직 대통령을 옹호하는 것이냐. 노조 활동 자체가 잘못이라는 말이냐.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정정했고, 다시 같은 요약이 돌아왔다. 첫 번째 토론방과 똑같았다. 나는 그때 이렇게 적었다. 낙인찍기라고, 토론할 생각도 없이 자기가 규정한 사람으로 분류해버린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이러니까 정치에 과몰입한 인간과는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문장을 쓰는 순간에는 몰랐다. 방금 내가 무엇을 했는지.
세 번째는 이 글을 쓰는 동안 일어났다. 나는 두 번째 논쟁의 기록을 다시 꺼내 검토했고, 검토를 도운 쪽이 내 말을 이렇게 정리했다. 나는 그 조직이 정치관을 수업에서 설파하는 조직이라고 주장했으며, 그 주장에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한 명의 교사를 보고 조직 전체를 규정한 것이라고.
원문을 다시 읽었다. 그런 문장은 없었다. 내가 쓴 것은 한 교사의 행위를 겪었고, 그가 그 조직 소속이었으며, 그래서 좋은 감정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조직이 그런 성격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지적하자 답이 왔다. 감정은 자유지만 이유를 붙이면 검증 대상이 된다고. 내가 쓴 어느 문장에 그런 말이 있느냐고 다시 묻고 나서야 원문이 제대로 읽혔다.
세 번이었다. 세 번 모두, 내가 실제로 쓴 문장이 아니라 내가 속한다고 짐작된 유형이 반박당했다.
아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여기서 멈추면 이 글은 물타기가 된다. 구조가 확신을 만든다는 설명은 확신을 선택한 개인의 몫까지 지워주지 않는다. 시대가 신앙의 형식을 준비해두었다 해도,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기로 한 것은 개인이다. 자기가 요약한 상대의 말이 정말 그 사람의 말이 맞는지 한 번 더 확인하는 일은 어떤 구조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 문장은 나에게도 돌아온다.
첫 번째 토론방을 나온 뒤 나는 그 사람을 하나의 유형으로 정리했다. 정치에 과몰입한 사람,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한 일은 그가 나에게 한 일과 무엇이 달랐나. 그도 나를 분류했고 나도 그를 분류했다. 그는 나를 어떤 진영의 변호인으로 읽었고, 나는 그를 어떤 병리의 사례로 읽었다. 둘 다 상대의 문장을 읽는 대신 상대의 종류를 읽었다.
그리고 세 번째 자리에서는, 낙인의 구조를 나에게 설명해주던 쪽이 같은 일을 했다. 그 구조를 문장으로 정확히 서술할 수 있는 능력과 눈앞의 문장을 그대로 읽는 능력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앞의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뒤의 것이 따라오지는 않았다. 세 사람 모두 악의가 없었고, 세 사람 모두 자기가 정당한 지적을 한다고 여겼으며, 세 사람 중 누구도 그 순간에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이단을 판별하는 습관은 신을 믿는 사람에게만 생기지 않는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 습관을 비판하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글로 쓰고 있는 사람에게도 생긴다.
그리고 그 습관은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고 세대에서 세대로 옮겨간다. 그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다뤘다.
어쩌면 이단도 사탄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손으로 만들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 글은 공개된 조사 결과와 언론 보도, 학술 논의를 근거로 작성되었습니다. 본문의 토론방 경험은 필자가 겪은 일이나, 특정 개인이나 단체를 식별할 수 있는 정보는 배제했으며 그 사람들의 내심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인용된 조사는 경향신문·중앙일보·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공동기획, 한국리서치 조사(2025년 12월 29~31일, 전국 성인 3000명)와 시사IN·한국리서치 6·3 대선 이후 유권자 인식 조사입니다. 팬덤 정치에 관한 서술은 국회미래연구원의 '한국의 정치 양극화 유형론적 특징 13가지'를 근거로 합니다. 청년층의 정치 성향에 관해서는 학계의 견해가 갈리며, 본문은 특정 세대나 성별, 종교, 직능 집단 전체의 성격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참고자료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경향신문·중앙일보 공동기획 조사 (정서적 양극화, 강성 지지층, 갈등 책임 수치)
https://www.khan.co.kr/article/202603300601001
한국 정치 분열, 이념 양극화 아닌 ‘정서적 양극화’…12·3 내란 이후 32% 자기검열 강화
한국 사회의 정치적 분열은 이념의 양극화보다는 정서적 양극화가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12·3 내란 이후 가족·친구와 정치갈등 경험이 있거나 사회가 분열돼 있다고 인식하는 경우 정치적
www.khan.co.kr
국회미래연구원 '한국의 정치 양극화 유형론적 특징 13가지' (팬덤 정치)
https://eiec.kdi.re.kr/policy/domesticView.do?ac=0000176462
한국의 정치 양극화: 유형론적 특징 13가지 | 국내연구자료 | KDI 경제교육·정보센터
국회미래연구원은 우리 국회가 해결을 고심하는 정치 양극화의 한국적 특성 13가지를 집약해 설명하였다. 한국의 정치 양극화가 가진 특징 13가지> 1. 극단적 당파성에 따른 무책임한 정당정치 2.
eiec.kdi.re.kr
https://www.ever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971
한국 정치의 양극화 '13가지 유형과 특징' - 에브리뉴스 EveryNews
[에브리뉴스=김종원 기자] 국회미래연구원 박상훈 연구위원(거버넌스그룹)은 3일 6인의 국회의원실(이명수·최형두·김종민·김영배·이은주·조정훈)과 경제·인문사회연구회, 한국행정연구원,
www.everynews.co.kr
시사IN·한국리서치 6·3 대선 이후 유권자 인식 조사 (20대 남성 57%, 극우 자기인식 세대별 수치)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007
“20대 남자 극우화? 충분한 증거 없다” [6·3 대선 이후 유권자 인식 여론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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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sisain.co.kr
연세대 최영준 교수 (희생양 메커니즘)
https://imnews.imbc.com/replay/straight/6728011_289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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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남성' 의 선택 이재명 대통령을 탄생시킨 지난 21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재명 후보의 압승을 예상한 출구조사 결과 이면에 단연 눈에 띄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바로 2...
imnews.imbc.com
청년 극우화 담론에 대한 반론 (디스클레이머 근거)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7414
미디어의 ‘20대 남성 극우화’ 프레임, 일반화해도 괜찮을까 -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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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mediatoday.co.kr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55954
20대 남성 극우화 담론의 역설... 이들을 주목해야
정치 현상을 '세대'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최근 20대 남성 극우 현상이 주목받고 있지만, 이를 세대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부분적 성향
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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